
예수님이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컸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성전도 아끼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 대하여 선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머리로 믿는 사람이 있고, 가슴으로 믿는 사람이 있고, 온 몸으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로 믿는 사람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압니다. 가슴으로 믿는 사람은 말씀에 감동을 받고 살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합니다. 온 몸으로 믿는 사람은 아는 것과 감동이 행동화되어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행동이 따르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온 몸으로 믿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조이스 마이어는 ‘단순함이 주는 기쁨’이란 책에서 “믿는다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한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보면 세상을 참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 불쌍해 보입니다. 그런데 믿는 것보다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이 따라야 하며 행함이 있는 믿음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블롱델은 “어떤 사람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으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믿음도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행동을 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9:4에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살아있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에서 “선한 행위는 비록 구원의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구원의 증거가 된다. 믿음은 행위 위에 구축되어서는 안 되거니와 행위는 반드시 믿음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 믿음은 행위를 정당화(justify)하고 행위는 믿음을 증거(testify)한다”고 합니다. 행위 그 자체는 믿음을 동반해야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